
뇌는 어떻게 나를 조종하는가
크리스 나이바우어
데이원 멤버 11명이 이 책을 서재에 담았고, 9개의 구절을 남겼습니다.
멤버들이 밑줄 그은 문장
세 번째 선택지는 이른바 중도라고 불리는데, 앞의 두 가지 길에 한 발씩 걸친다. 이 길을 선택하면 게임을 딱 재미있을 만큼만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아이가 축구 게임에서 이기면 함께 기뻐하고, 승진에서 탈락하면 슬픔도 느낀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 감정에 너무 깊이 빠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감정에는 늘 옅은 미소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패배 없이 승리는 있을 수 없고, 모든 승리는 궁극적으로 패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미소다.
인생은 게임이다. 무기력할 시간이 없다. 재미있는 것만 해도 모자라. 진맥의 대가가 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주말에는 미뤄 둔 강의를 시작해야지. 자주 되뇌이는 구절로 이 책을 마무리해야겠다. Let's go. Why not?
정수아
그 결과, 우리는 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자아가 실은 환영에 가까우며, 이것이 인간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상당 부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환영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 현실만이 본질이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내 자아는 사탕껍질일 뿐이라면, 현실에 무슨 의미가 있지?.?..?.????
정수아
연민 또한 우뇌의 영역이다. 불교에서는 연민을 ‘타인을 잠재적인 나 자신으로 보는 능력’ 또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봄’이라 설명한다. 연민은 큰 그림에 관한 것이고 그건 우뇌의 전문 영역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진정한 연민은 오직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을 때 일어난다.
연민의 해석을 보니,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나’의 확장이다.’라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유난스럽게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다. 나는 나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나’의 범위가 유독 크고, 그 모든 ‘나’를 사랑한다. 나, 내 가족, 내 친구, 내 직장, 내 업계, 내가 스친 모든 것들. 가끔 ‘나’ 속에서 실제의 나와 타인을 구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표면적으로는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겠지만... 결국모두나니까나와나사이에는손익이란없으니까 . . . . . . 그러나 별개로 모든 타인을 나로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느낀다. 차가워 보인다거나 첫인상(n)과 다르다(p)는 말을 듣는데 . . . ‘나’의 확장에 속하지 못한 대상에게는 종종 과도하게 무관심한 것 같다................ (ㄴ 사실 그런데 남에게 어디까지 호기심을 가져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나의 경우엔 내가 말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남들이 모르는 척해 줬으면 하는 사람이라. . . . .. . . .) 아무튼 요즘 가장 고심하는 것이 타인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대화법..이라 그런지 뭐든 계속 그런 쪽으로 생각이 난당. 일기 블로그 대용으로 쓰는 것 같기도 하궁. 완독하면 대화에 관한 책을 읽어야겠당.
정수아
모든 감정을 완전히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더 이상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이 감정을 지배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해석적 마음이 감정을 지배하길 포기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주인이 되려는 짓을 멈춘다.
이게 무슨 뜻인지 완벽하게는 이해되지 않지만••• 1) 오늘 조언을 받았다. 슬픈 영화 감상하기. 영화 볼 정신도 없다면 유튜브에서 슬픈 영상 틀기. 2)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과 휘둘리는 건 다를 텐데! 나는 늘 후자다 .. ... 아주 속 절 없 이 . . . 🥺
정수아
할 수 없이 애들이 뛰고 있는 축구장을 가리키며 ‘저 밖에’ 축구 대회란 없고, ‘저 밖에’ 축구팀이란 없으며, 골을 넣어 점수를 낸다는 것도 없음을, 이 모든 것이 우리 머릿속에서 지어낸 일단의 이야기일 뿐이라 설명했다. ‘저 밖에’ 있는 것은 오직 꼬마 애들 한 무리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공을 차는 것이며, 그 외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우뇌의 현실에선 승자도 패자도 없고 팀도 대회도 없다. 거기 있는 것은 오직 존재함being 그리고 행함doing뿐이다.
책의 원주제와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 이런 이유로 나는 예체능에 위아래가 없고 다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행위 그 자체에 목적성이 있다기보다는 이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목표 아닌가? 가끔 다른 예체능은 신격화하면서 가요산업을 비하하는 걸 보면 웃기다.
정수아
심리학과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현재의 나, 되고 싶은 나를 구분하며 일종의 범주 만들기 놀이를 반복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둘로 쪼갠 뒤 더 나은 나로 살지 못할 때 고통을 느낀다. 우리는 더 똑똑해지고, 더 매력적이고, 더 성공하고 싶다. 이 모든 바람이 바로 우리의 ‘문젯거리’다.
내가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다. 게으르고 모자란 순간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괴롭다. 내가 선하고, 성실하고, 사회적 성취를 이루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마음이 평안해진다.
정수아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신념을 위해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었다. 단, 모든 신념이 그런 것은 아니고 자신이 믿는 바가 단지 신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만 그렇다. 이것이 해석 장치가 생각으로 이루어진 신념을 실제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방식이다.
나와 내 가치관은 별개이다. 1. 다만 우리는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을 때 그가 가진 (혹은 가질 듯한) 의견에 대해 반박하는 식으로 발언할 때가 종종 있다. 2. 책에서는 계속 “나”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러나 내 가치관이 모여 내가 되지 않는다면 ... 나는 누구인가. 그저 뇌세포들의 집합인가?
정수아
여기서 어느 설명도 진실이 아니지만, 이 해석하는 마음에게 진실은 중요치 않다. 자신의 설명과 해석이 옳다는 확신에 차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 모든 직감은 좌뇌의 장난일 뿐이었던 건가......... 🥺 나는 많은 것을 감에 의존해 왔고, 그게 틀린 적이 많이 없었는데... 이제는 무엇을 믿고 앞길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수아
아마도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나’를 실재하는 어떤 사물로 보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실재가 아니라 생각의 흐름 혹은 단순히 개념에 불과하다는 말을 받아들이려면 누구나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뇌를 조절할 수 있으면 뭐가 먼저인 거임? 나.. 는 뇌의 결론일 뿐이라면? 결국 뇌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잖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뇌를 “조절”할 수 있다........... 라는 건 결국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나라는 객체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내 행동을 이끌어갈 수 있다... 라는 뜻이겠지 근데 나라는 객체가 그것보다 뇌의 자극을 더 중요하시한다면? 결국 그게 행복이라면? 자기파멸이 곧 행복이며 내가 그걸 인식한다면? 그건 “조절”하지 않는 것이 곧 자기통제인 것 아닌가?
정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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