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그은 책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데이원 멤버 0이 이 책을 서재에 담았고, 14의 구절을 남겼습니다.

멤버들이 밑줄 그은 문장

  • 단지 생각을 다르게 했을 뿐인데 같은 세상에서 누구는 지옥에 있고, 누구는 천국에 있고, 누구는 과거에, 누구는 미래에, 또 어떤 인간은 현실에, 또 어떤 인간은 다른 차원에 있다는 건, 도대체 뭐지? 정작 기억해야 할 건 기억하지 못하면서.

    폐허로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도 서로를 일으키는 건 결국, 애틋한 기억과 사랑을 지키려는 마음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어지러운 세상을 기꺼이 품을 수 있다. 근데 정작 곁에 있을 때는 고마움을 잘 모를 때가 많다. 작은 것 하나하나에 집요해지지 말고 존재에 감사할 줄 알자 근데 또.. 그래야 함을 알지만 내 생각과 마음을 스스로 조정하기 참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박세현

  • 그녀는 버려진 연구실 인큐베이터 속에 든 화석 같았다. 몇십억 년 전에 끊겼어야 했던 숨이 타의에 의해 억지로 붙들렸다. 때를 놓친 숨에서는 해묵은 냄새가 풍겼고, 숨의 주인은 이미 오래전 삶으로부터 망명한 듯했다. 그녀는 빛바랜 사진 같았다. 아니, 그보다 햇빛과 바람에 풍화된 그림 같았다. 전시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채 닿지 않는 복도 끝에 초라하게 놓인, 작자 미상의 전시품. 훔쳐 가도 아무도 모를,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그렇게 죽어도 아무도 모를. 처음 보는 이였지만 은미는 그녀에게 알 수 없는 흔연함을 느꼈다. 동시에 혐의했다. 삶의 기록을 담고 있지 않은 얼굴을 은미는 응시하다, 흔연과 혐의 모두 처음 보는 그녀에게서 느낀 동질성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쩍 마른 그녀의 초라한 뒷모습은 해가 뜨지 않은 새벽녘 식탁 의자를 거실 베란다 앞까지 끌고 와 앉아 있던 은미의 뒷모습과 닮았다.

    흔연함이란 기쁘게 받아들이는 마음, 반가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호감. 혐의란 의심 또는 꺼림칙하게 여김을 뜻한다고 한다. 범죄 혐의할 때 그 혐의와 같은 말이라고... 그러니까 은미는 그녀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나와 닮았다 라는 친밀감, 공감의 흔연함과 더불어 저 모습이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 라는 거부감과 두려움의 혐의를 함께 느꼈다는 말. 소설 읽으면서 단어가 어려워서 글이 안 읽힌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처음으로 사전을 찾아가면서까지 이 페이지 전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처음 보는 단어도 두 개나 발견했고... 이렇게까지 묘사를 구체적이고 반복적으로 하는 이유가 있으려나? 전체적으로 약간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든다.

    박세현

  • 염증 같은 응어리는 떼어내는 연습을 해야 해. 염증은 몸을 붓게 만들고, 몸이 부으면 숨 쉬는 것도 힘들고 시야도 탁해지거든. 그런 몸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마주하기 힘들어. 사람은 몸이 힘들면 똑같은 것도 더 비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거든. 고마운 것들에 집중하자. 아빠는 세상이 이렇게 변해도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일 감사해.

    몸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들을 떼어내야 한다. 확실히 잠을 많이, 그리고 제때 같은 시간에 자고, 건강 관리를 조금이라도 하면, 훨씬 에너지도 많고 너그러워진다. 그리고 혹시 몸이 힘들어져 날카로워진다면, 고마운 것에 집중해보자!

    박세현

  • 그리고 제비야, 어떤 것이 새고, 어떤 것이 인간인지 구분하려 하지 말자. 그저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에만 집중하자. 우리가 눈을 맞추고, 서로를 부르고, 서로를 안을 수 있다는 것에만. 그거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니?

    소설의 거의 1/3 이상이 등장인물 2명 사이의 단순 편지로만 구성이 되는데, 이렇게까지 상황이 그려지고 분위기가 전해지도록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대단하다... 좀비라는 글자는 언급도 되지 않았는데 마을에 점점 더 좀비가 많아지고 급박해지는 상황이라는 것이 실감이 확 난다.

    박세현

  • 아빠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은, 행동하지 않았다면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는 죄가 될 수 없다는 거다. 마음마저 순결한 사람을 적어도 아빠는 살아오면서 본 적이 없다. 단지 순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열매 같은 거란다. 씨앗은 같지만 어떤 과육은 싱그럽고 어떤 과육은 썩어 있지. 또 어떤 건 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쓰기도 하지. 떫기도 하고, 혀를 아리게 만들기도 해. 같은 씨앗이 모두 같은 맛을 내지 않는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중요한 건 씨앗보다 과육이야. 마음보다 보이는 모습이 어떤지가 더 중요한 법이야. 아빠가 늘 말했잖니. 사람들의 친절은, 그냥 친절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그 속에서 어떤 안타까움이나, 어떤 우월함이나, 어떤 기만이 들어 있다고 한들 우리가 그것까지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고. 엄마도 마찬가지야. 엄마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 엄마는 그저 종일 누워 하늘만 바라볼 뿐이니까. 그러니 엄마가 심심해할 거라고, 외로워할 거라고, 슬퍼할 거라고 생각해서 너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지 말기로 아빠랑 약속했잖니.

    저 사람의 속은 어떨까, 내가 전에 이렇게 했으니 나를 어떻게 생각할 거야, 처럼 나는 상대의 속내에 대해서 늘 고민하고 궁금해하고, 나아가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좀 더 심플해지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다. ‘친절은 그냥 친절로 받아들이면 된다‘ 속마음이 어떻든지 간에 일단 나에게 친절하고 싶어준다면야 고맙게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박세현

  • 이제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아파트의 구조를 친구들이 되게 신기해했어. 기다란 복도에 일렬로 줄지은 현관문들이 마치 지네가 벗어놓은 신발처럼 줄지은 것 같다고 하더라. 나도 알아. 그게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나를 비웃는 거라는 거. (중략) 나를 초대하는 날이면 마치 내가 엘리베이터를 단 한 번도 타본 적 없다는 듯이 하나하나 설명해 줘. 그런 기능들은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도 다 있는데 말이야. 그럴 때마다 그냥 애송이들 자랑을 들어주는 편이야. 나도 자랑할 건 많은데, 굳이 하고 싶지 않아. 해가 질 때, 눈이 올 때, 비가 올 때 아파트 복도에 의자를 끌고 나가 엄마랑 나란히 앉아 바라보는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애들은 모를 거야. 무소음 공기청정기가 24시간 내내 돌아가는 집은 오전과 오후에 부는 바람의 무게가 다르다는 걸 모를 거야. 햇볕이 아주 뜨거운 여름에는 새들이 난간에 앉아 쉬었다 간다는 것도,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날에는 이웃 누군가 만들어 놓은 눈오리들이 난간에 줄지어 앉아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나한테 무슨 자랑을 그렇게 해대는 걸까? 그 기다란 복도. 내가 어릴 땐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놀았던 긴 복도. 과자 한 봉지를 까서 아주 천천히 걸으면 복도가 끝날 때 쯤 한 봉지를 다 먹을 수 있던 긴 복도, 눈물의 유통기한이 필요할 때 딱 저 끝까지만 울자며 기한이 되어주었던 긴 복도. (중략) ~ 그 복도를 누려보지도 않고서 말이야. 내가 이런 것들을 자랑하면 애들은 기가 죽어버릴 거야, 이런걸 경험한 애들은 우리 반에서 나밖에 없을 테니까.

    글에서 정겨운 내음새가 물씬 나서, 너무 좋은 나머지 모든 문장을 다 복붙해오고 싶은 것을 겨우 자제했다. ㅎㅎ; 10년쯤 전의 정 있던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복도식 아파트에, 여름이면 24시간 가동하는 인버터에어컨 대신 모기장 달린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복도의 가장 끝에는 그 층의 어른 아이 자전거가 모두 모여있던, 이사 온 다음 날엔 엄마랑 같이 시루떡을 사러갔던 그 시절로. 그 때는 세상이 좀 더 살만하고 희망적이고 따뜻했던 것 같은 건, 어린이었던 내가 덧씌운 미화이자 환상이겠지? 깔끔하고 모던한 색 없이 높은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이 부의 상징이 된 요즘, 나도 그런 곳에 살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이런 글을 읽으면 그래 낭만있다 그립다 생각이 드는 것이 좀 모순적인 것 같다. 내 개인의 여건이나 취향보다도 남들 시선에 비추어졌을 때 성공‘해보이길‘ 내심 원하는 내 속마음인가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같은 환경이더라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리 묘사될 수도 있구나. 무던함과 긍정적 생각이 정말 중요하다. 비교에는 끝이 없고, 결국엔 내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거다. 는 생각을 했다.

    박세현

  • 내가 가져온 것들 봤어? 어디서 들었는데 처음에 난리 났던 곳들이 의외로 먹을 게 많이 남았대. 그럴듯하게 들려서 가봤는데, 그 말이 맞았어! 광장시장 안에 있는 식자재 마트, 거기에 물건이 꽤 많아.

    책의 내용과 좀 많이 다른 엉뚱한 말이지만... 요즘 하고 있는 생각들에 힌트가 되진 않을까? 싶어 이 구절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전국민이 주식에 뛰어들고, 부동산 값은 천정부지로 오르는 요즘, 돈도 없으면서 자산에 대한 관심만 늘었다ㅎ 또, 아직 본업도 없는데 부업 생각까지 막 한다. ㅎㅎ;; 그러면서 자연히 드는 생각은 어디가 내 영역일까. 뭘 해야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디가 블루오션일까. 하는 생각이다. 멀리 보는 눈이 부족한지, 내 눈엔 지금 당장 인기 있는 종목, 지역, 일 등등밖에 안 보이는 듯 하다. 그와 동시에 섣불리 뛰어들지 못 하고 이미 고점인 건 아닐까 주춤거리며 맛보기만 하고 부러워한다. 나는 운명이나 삘을 좀 믿는 편인데... 이 문장이 나에게 힘을 좀 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 대상이 무엇이 됐든지, 회피하지 말고 중심이 되는 부분부터 차근히 공부하고 고민해보자.

    박세현

  • 꼭 날아야만 새인가? 우리를 정확히 분류하려면 공롱까지 거슬러 올라 가야해. 고작 인간 따위와는 뿌리의 깊이가 달라. 우리에겐 날개와 부리가 있어. 알을 낳지. 그런 여러 특징이 있어. 하지만 날개가 꼭 날기 위해 있다고는 할 수 없지. 모든 인간이 자기 신체를 전부 활용하며 사는가? 사용하지 못하면, 인간이 아닌가? ‘비행‘은 날개의 활용일 뿐, 새의 정의가 될 수는 없지. 마찬가지로 ‘보행‘도 ‘언어‘도, 다리와 입의 활용일 뿐 인간 본질이 될 수 없지.

    보행은 인간으로서 가진 신체적 특징, 언어는 정신과 문화적 특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두 가지 큰 틀도 인간 본질이 될 수 없다 말하다니. 앞에 내용을 읽어보니 왜 이렇게 말하는지 동의는 하나, 그러면 무엇이 인간의 본질일까? 사고? 이성? 아니면 단체생활과 사회? 본질이 무엇이던지 간에 인간만이 가진 것 중 하나는 메타인지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을 다시 생각하여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 인간만이 가졌다는 말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인간이라면 마땅히 발휘해야할 능력이라는 것이다.

    박세현

  • 아는 단어의 개수가 더 많다고 해서 더 옳은 말을 내뱉는 것은 아니다. 수한이는 앵두보다 더 많은 단어를 알지만, 앵두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이 이상한 말을 내뱉으니까. 그래서 앵두는 나에게 수한이보다 더 사람 같다. 수한이는 한 개 같고, 앵두는 한 명 같다. '이름 명' 대신 '목숨 명'을 쓰면 앵두도 명이라 부를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름 명 대신 목숨명이라니 신박하다. 맞는 말이다. 요즘 멘토링을 다니며... 공부도 공부인데, 일단 사람부터 되는 게 정말 중요하다. 많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정신이다. 잊지말자. 하는 생각을 혼자서 참 많이 되뇐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학생들을 훈계하기엔 그들은 꽤 많이 자라버렸고 나도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휴우

    박세현

  • 조건을 덧붙었어야 했다. 나는 묵호를 사랑하는 것 같아. 그리고 또, 이건 나의 예측이지만, 높은 확률로 묵호의 마음도 그럴 거야. 그러니 서로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절망으로 이어질 확률이 얼마나 돼? 사랑이 파멸이 되고 간절함이 재앙이 될 확률이. 의료실에 도착해 수동 분리 장치를 찾는 순간, 나는 저 멀리 복도에서 달려오는 묵호를 발견한다. 발목을 짓뭉개며 달려오는 묵호. 헬멧이 벗겨졌는지 얼굴을 훤히 드러내며 달려오는 묵호. 볼살이 뜯긴 묵호의 얼굴, 묵묵히 달려오는 묵호는 마치 붕어빵맨 같다. 키사, 붕어빵맨이 이 행성의 대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ㅠㅠㅠㅠㅠ 말 안 된다... 책 띠지에 “천선란 작가님께 묻고 싶다, 어떤 사랑을 해오신거냐고.“라는 박정민 배우님의 짤막한 감상평이 써있었는데, 너무 공감이 된다... 1/3도 안 읽었는데 머릿속에 벌써 영화 한 편 뚝딱 나온 것 같다. ㅠ

    박세현

  • 쉰 살이라는 건 너무도 완전한 어른 같았고,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했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어 보였다.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염치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한마디로 쉰 살이 된다는 건 제대로 된 어른이어야만 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어른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도 나이가 많아질수록 연식만 늘어난 성인이 아니라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곤 한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덕목에는 지혜, 포용, 겸손, 경험 등이 있는데, 이런 어른으로 자라고 있지 않을까봐 미리부터 부끄럽거나 올라가는 숫자에 부담인 마음이 들긴 했어도, ‘이런 내가 사회의 한 부분에 존재해도 될까?‘라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다. 안타깝고 짠했다.

    박세현

  • 언니나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말고, 동생은 내가 챙겨줘야 하니까. 나는 나를 챙겨줄 사람이 필요했다. 옷창 안에 같이 있어줄 사람. 떨고 있는 내 손을 잡아줄 사람. 내 손톱을 깎아주고, 귓바퀴까지 벅벅 닦아줄 사람. 그러다 어느순간, 마녀를 화로에 밀어 넣어 죽인 어느 동화 속 남매처럼 나와 함께 옷장 문을 열고 마녀를 밀어줄 사람. (중략) 나는 부끄러움도 없이 외쳤다. 지금부 더 선장은 나라고, 가고 싶은 곳 어디든 말해보라고. 그러자 묵호도 부끄러움 없이 대답했다. 어디든, 배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가자고. 그 순간 마음이 일렁였다. 내 마음속에 있는 아주 얕고 작은 웅덩이 안에서 붕어빵 한 마리가 지느러미를 움직인 것처럼. 나도 꿈을 꿔도 될까. 그렇다면 가장 멀리 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배에 묵호를 꼭 태워야겠다고 다짐하면서. ‘황옥주. 우리 뭐가 되든 사람은 죽이지 말자.’ 배가 한참 망망대해를 떠다닐 때 묵호가 말했다. 뜬금없는 말처럼 느꼈다가, 그런 말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 웅덩이에 사는 붕어빵이 더 커졌다. 조그만 흔들림에도 물이 흘러넘칠 것 같았다. ‘그 사람에 나 자신도 포함이야.’ 묵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너를 죽이지 마.’ 우리의 뗏목은 망망대해를 지나 우주로 나가고 있다. ‘좀비가 되어서도 아무것도 죽이지 말자. 우리는 그럴 수 있어. 그 얼굴이 되지 않을 수 있어.’ 그 얼굴이란 건 좀비의 얼굴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묵호 아빠의 얼굴을 말하는 걸까. 고민은 금방 끝났다. 두 얼굴이 똑같아서.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랑은 하지 말라고들 말한다. 의지하는 관계가 아닌, 각자로서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성숙한 사랑의 산물이라고. 그러다 이렇게 날 것의, 솔직하고, 무언가 경지를 넘은 듯한 사랑을 보고 읽으니 참 마음이 묘했다. 역시 사랑 앞에서 사람은 한없이 나약하구나. 이토록 연약한 사람을 끝까지 살게 하는 사랑은 얼마나 강인한 것인가. 그 앞에서 좋은 사랑 나쁜 사랑을 따질 수 있을까.

    박세현

  • 묵호의 말에 따르면 아저씨는 항상 탄수화물 없는 식사를 고집했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거실에 놓인 사이클을 1시간 이상 탔다. 그래서 묵호는 탄수화물이 인간성의 척도가 된다는 낭설을 맹신했다. 탄수화물이라면 떠오르는 것들이 갓 지은 따뜻한 밥, 연기가 포슬포슬 올라오는 감자나 고구마, 달콤하고 따끈따끈한 빵 따위가 있는데, 이것들이 감정의 다정함과 닮았고, 단백질이라면 떠오르는 닭가슴살, 안심, 달걀 따위는 뻑뻑하여 말 그대로 인간의 폭력적인 근육과 닮았다고 말이다. 아저씨는 탄수화물은 먹지 않고 단백질만 많이 먹어서 폭력적이다. 지나친 비약이지만, 묵호와 나는 그렇다고 결론을 내렸다.

    ㅋㅋㅋㅋ 재밌는 표현이다. 이래서 내가 이 작가님을 조아한다 너무 은유적이지 않고 직관적인데, 이미지 연상도 참 잘 된다. 게다가 신선하다. 나도 탄수가 인간성의 척도가 된다는 낭설을 믿는다. 왜냐, 요즘 자체적 탄수 파티 중인 내가 행복하다. ㅎㅎ

    박세현

  • 진솔함은 무례함이 되고, 명료함은 매정함이 되는 이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하는 ‘옳은’ 생각을 표현해내는 게 가장 우선인 사람들이 이렇게 종종 있는 것 같다. EQ가 떨어진다고 느끼곤 하는데... 이런 사람들과는 언제쯤 유연하게 잘 지낼 수 있을까 방학한 덕에 해방되어서 너무 조타. ~~

    박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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